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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교동도(喬桐島), 70년전 그 비극의 현장에서 작은 화해와 위로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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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국내)

강화도 교동도(喬桐島), 70년전 그 비극의 현장에서 작은 화해와 위로의 시간을 가졌다.

새로운 패턴의 韓流/ 분단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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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막 단장한 평화학교에서 진지하고도 엄숙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사진 권오철 기자) 


강화군 교동도 19511, 민간인 학살자유족과 함께하는 유족지 탐방 및 간담회가 난정평화교육원에서 유족 및 전문가 그리고 일반인등 20여명이 모인 가운데 처음으로 열렸다.

좀 지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은 모든 적폐가 분단의 왜곡에서 온다는 것을 알고 이를 조금이라도 극복하려는 노력은 결국 평화를 가져오고 조금이라도 이해의 폭을 넓혀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인도와 같은 경우, 분단의 아픔을 겪은 그들로서는 상호 공감하는 부분의 韓流라고 할 수있다.

 

()우리누리 평화운동, 인천민족화해위원회,KNSL코리아원구원,강화교동한국전쟁희생자유족회가 주최,주관,후원 하였다.

오전 930분부터 일곱군데의 현장중 안개산, 고구리ㆍ인사리,방골,대룡시장내 감금소등을 방문하고 그 당시 상황을 유족으로부터 직접 듣고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픔을 생생히 느낄 수있었다.

 

평화의 섬 교동도에는 1950년 전쟁 발발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바로 앞 연백군의 피난민이 몰려오고 가족이 이산되고 좌우익으로 갈리는 상황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른바 켈로부대, 타이거 부대라는 미군 첩보부대의 본부가 있고 여기에 소속된 월남한 연백군 우익 청년으로 만들어진 특공대라는 것이 비공식적인 무장 활동을 전개 함으로 써 비극의 서막은 열린다.

 

이 부대는 연백에서 교동으로 밀려 내려와 교동을 기지로 하요 정보 및 특공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연백으로 넘어간 월북자 가족이나, 물건너 연백에서 월남한 사람중에서 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중에서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좌익에 대해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으로 조직적인 민간인 살해를 감행했다.

 

주로 해변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곳에서 사살하고 놔두면 시체도 찾지 못하도록 하였고, 어린이,부녀자가 거의 절반을 넘었으니 이는 보복의 도를 넘은 야만적인 행위였다.

인사리(人士里)’50를 내려온 황씨 문중에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 사회주의 성향이라고 몰살 시킨 경우도 있고, 무혐의로 인천 검찰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교동으로 배를 타고 들어오자 지서장이 물가에서 보트를 향해 사격하여 전부 사살한 경우도 있다.

 

특히 안개산교통호 부근에서는 증언자의 삼촌부부,동생등이 죽었는데 당시 1.2세의 아이가 세명이었고. 밤새 아이울음 소리가 들렸지만 누구도 무서워 올라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아기의 빳빳하게 얼어버린 시신을 보고 차라리 총으로 쏴죽으면 편했을 텐데 그 어린 것들을 밤새 추위에 얼어죽게 했냐는 원망까지 있었다니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아기들을 쏘지 않은건 특공대 소대장 장교가 차마 아기는 못 쏘겠다 해서 그리 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고구리에서 총에 맞고도 살아온 사람을 다음날 다시 와서 사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증언자의 고모는 총을 맞고 내려가지 않고 있다가 다음날 꽁꽁 언 시신으로 발견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방골(方氏네 사는 골짜기)’에서 모 할머니는 두 살로 모르지만 들은바에 의하면 아버지가 대룡시장내 임시 구치소에 있다가 어머니가 밥을 넣어 주었지만 어느날 받지 않자 틀렸다고 생각하고 밤새 고부간에 울었다고 한다. 그 시신은 나중에 증언자가 24세에 이장 할때 보니 한쪽 어깨 부분이 뼈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고 한다. 증언자는 당시 두 살이라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 생각에 눈물을 70년이 지난 지금 증언하면서 쏟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이야기이다.

특히 당시 가족사진을 가져와서 울분과 회한의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오열했다.

그리고 당시 할머니의 부친이 갇혀 있던 가옥은 지금 대룡시장내 만화그림이 그려진 곳인데, 여기서도 아 어머니가 밥을 가지고 가서 넣은데 어느날 특공대 군인이 가져 오지 말라해서 어머니가 힘없이 돌아 오면서 할머니랑 고모랑 모두 울면서 이젠 틀렸다 하면서 통곡했었다라고 들었다.’면서 또 오열했다.

 

그리고 모 증언자는 할머니가 소를 특공대에게 잡아주고 손자인 자신과 자신의 동생을 빼내려하자 어머니가 할머니를 노려보면서 아기인 작은 아들을 놓아주지 않아 그는 죽고 말았다.

그 연유를 할머니는 모르겠다고 하면서 늘 증인이 클 때까지도 되뇌었다고 한다.

 

또 마지막에 어느 할머니는 어머니가 너는 김씨가 아니고 데리고 온 일꾼이라 하고, 정씨이고 일곱 살 때 팔려왔다고 어린 나이에도 주장하여 살았지만 그 고통을 평생을 따라 다니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현장 답사 마지막 안개산 교통호에서는 30여명이 죽었는데, 답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국화꽃 한송이 씩을 바치고 묵념의 예를 드리면서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같이간 유족들에게 아픔을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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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로 위로와 용서를 나누면서 뜨거운 포옹으로 작은 화해의 장을 가졌다.  사진 권오철 기자)

 

난정평화교육원으로 가니 원래 난정초등학교 였으나 인천시교육청에서 단장하여 현대식 평화교육원으로 거듭 태어나게 해서 지금껏 어두운 마음을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

 

전문가들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내용 발표가 간단히 있었다.

어느 분은 유치원생 때 조차 자신이 보니 오씨네와 임씨네 아이들 사이에 장벽이 있어서 알아보니 두 집안이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로 삼대를 내려 오면서도 화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 했다고 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당시 특공대는 북측 연백과 남쪽 가족간의 연계를 막고 자신들의 안전과 또 북한 현지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도 하였다. 또 화해는 아직 어려우며 다만 몇 곳에사 합동 위령제 정도는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한다고 말했다.

 

또한 위원장 되는 피해자 가족은 어린 나이라 모르지만 그 빨갱이 아이라는 이야기는 서럽도록 아팠다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여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평화군인회 관계자는 군인의 명령 복종에 대한 이야기와 그 명령권자의 책임을 역사에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멀리서 온 모교사는 아버지가 고아라는 말을 하면서 할아버지의 억울한 경북지방에서 학살 피해를 증언하면서 울먹였고, 제주 4.3의 피해자인 모 교장도 역시 울분에 찬 소회를 밝혔다.

 

그리고 이어 일견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서로를 위로 하는 퍼포먼스와 대화와 허그와 장미꽃 교환이 있었다.

 

김영애 우리누리평화운동 본부장은 본 모임을 첫 번째로 주최하면서 조심스러우나 화해만이 평화를 가져 온다고 제삼 강조하고 이일을 계속 할 것이라 하였다.

본기자는 먼저 사실관계의 확실한 확보와 보존, 그리고 판단의 시각은 조금씩 맞춰 나가고,진정한 위로와 사과, 그리고 국가적 보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지난날 베트남 한국군 학살현장 하미마을에서 한국인으로 미안하다고 하자, 개가 물었다고 개를 욕하지 않는다, 개주인을 욕하지. 하던 모멸적인 베트남인의 답변을 상기 시키고, 60년대 경북 낙동강에서 어느 할머니가 여기 강변에 국군이 청년들을 쏴죽이고 목을 잘라 트럭에 두 트럭 가득 싣고 가는 걸 봤다. 는 말을 중학생때 듣고 괴뢰군이 아니고 국군이 그랬느냐고 몇 번 묻다가 충격을 받을 일을 상기했다. 그리고 억울한 인생은 있어도 억울한 역사는 없다.‘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기록과 증거를 남긴다면 언젠가는 그 억울함을 풀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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